줄거리
장마가 사흘째 이어지던 밤, 세인그린빌 아파트 중앙 조경의 분수 옆에서 한 여자가 숨진 채 발견됩니다. 열두 개 동 가운데 홀로 떨어진 회색 임대동에 살며 딸을 키우던 과외 교사 한소연입니다. 정황은 옥상에서의 추락이고, 경찰서장은 사흘 안에 정리하라고 말합니다. 재건축 동의서를 받고 있는 단지는 일이 조용히 끝나기만을 바랍니다.
전보 온 지 여섯 달 된 형사 강도현은 그 결론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탐문을 돌수록 이웃들은 입을 맞춘 것처럼 그녀를 "예민한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누구도 그녀와 오래 이야기해 본 적이 없는데, 다들 같은 얼굴을 알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 한 마디씩 보태 완성한 얼굴입니다.
그사이 단지 커뮤니티 앱에는 소연이 죽기 전에 예약해 둔 폭로 글이 하나씩 올라오기 시작합니다. 여러 집을 드나들며 아이들을 가르치던 그녀는 단지의 비밀을 누구보다 많이 알고 있었습니다. 재건축 추진위원회 부위원장, 학부모 단톡방의 실세, 입주자대표회의 회장, 한 정신과 의사, 전남편까지 용의선상에 오르는 이름은 늘어납니다. 그런데 강도현이 쫓을수록 질문은 누가 밀었는가에서 조금씩 다른 곳으로 옮겨 갑니다. 그 자신에게도 전임지에서 덮어 둔 일이 있습니다.
소설은 형사의 수사를 따라가는 장들 사이사이에 죽은 소연과 주변 사람들, 남겨진 딸의 내면을 비추는 짧은 장들을 끼워 넣습니다. 형사와 함께 이웃들을 판단하며 읽다 보면, 어느 순간 그들 각자의 안쪽에서 같은 사건을 다시 보게 됩니다.
등장인물
- ·강도현 하윤경찰서 강력계 형사. 이 년 넘게 열한 시 이십 분에 멈춰 있는 손목시계를 그대로 차고 다니며, 전임지에서 있었던 일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습니다.
- ·한소연 임대동에 살던 서른아홉 살 싱글맘이자 과외 교사. 남의 집에 들어가면 신발장부터 보는 사람으로, 가장 낮은 자리에서 단지의 많은 것을 보았습니다.
- ·민하람 소연의 열한 살 딸. 엄마가 떠난 뒤 친척이 오기를 기다리며 회색 동의 집에 남아 있습니다.
- ·정은아 학부모 단톡방에서 가장 목소리가 큰 사람. 자신을 선량한 이웃이라고 믿습니다.
- ·오태식 단지의 늙은 경비원. 소연에게 다정했던 몇 안 되는 사람이지만, 형사 앞에서는 좀처럼 눈을 들지 않습니다.
첫 장면에서
강도현은 우산을 쓰지 않았다. 세인그린빌 정문을 지날 때부터 어깨가 젖었고, 이제는 젖은 줄도 몰랐다.
덮는 건 쉬웠다. 그는 그걸 알았다. 전에 해봤으니까.
소설은 비 내리는 단지와 짧은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첫 장에서 강도현은 시신을 덮은 천을 들추지 않고, 여자의 수첩도 열지 않고, 멈춘 시계의 태엽도 감지 않습니다. 인물이 하지 않는 일로 그 사람을 보여 주는 방식이 소설 전체에 이어집니다. 비와 유리창, 멈춘 시계 같은 사물도 이 장면에서 처음 등장해 이후 여러 번 다시 돌아옵니다.
작가의 말
한 사람이 죽으면 우리는 대개 그를 죽인 한 사람을 찾습니다. 그래야 미워할 대상이 생기고, 그 사람이 벌을 받으면 세상이 다시 정돈된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현실의 많은 죽음은 그렇게 일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 옮긴 소문, 한 번의 모른 척, 별생각 없이 내린 판단 같은 것들이 오래 쌓여 한 사람을 벼랑까지 데려갑니다. 『민낯』은 그 '조금씩'에 관한 소설입니다.
무대를 아파트 단지로 정한 것은 그곳이 우리가 사는 사회를 작게 줄여 놓은 곳이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집값이라는 공동의 바람, 평형으로 그어지는 선, 임대동을 바라보는 시선, 단톡방에서 오가는 점잖은 감시가 한 울타리 안에 있습니다. 엘리베이터에서 목례하고 돌아서서는 서로를 평가하는 그 공간에는, 있어도 없는 것처럼 지나쳐지는 사람이 늘 한 명쯤 있습니다. 소연은 그런 사람입니다.
이 소설에 순수한 악인은 없습니다. 자기가 옳다고 믿는 평범한 사람들이 있을 뿐입니다. 뚜렷한 악인을 세워 안심시키거나 범인을 지목해 후련함을 드리기보다, 판단하며 읽던 얼굴들 사이에서 자기 얼굴을 발견하는 순간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언젠가 거울 앞에 섰을 때 이 이야기가 문득 떠오른다면 좋겠습니다.
함께 생각해 볼 질문
- ·이웃들은 소연과 길게 이야기해 본 적이 없는데도 모두 그녀를 "예민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평판은 어디서 시작되어 어떻게 굳어진다고 생각하시나요?
- ·강도현은 로열동 주민의 거짓말을 알아채고도 짚지 않고 넘깁니다.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어디까지 물었을지 떠올려 보시나요?
- ·따로 떼어 보면 죄라고 하기 어려운 행동들이 모여 한 사람을 무너뜨렸다면, 그 책임은 누구에게 얼마만큼 있을까요?
- ·내가 사는 동네나 일하는 곳에도 있어도 없는 사람처럼 지나쳐지는 이가 있는지, 나는 그 사람을 어떻게 대해 왔는지 떠올려 보시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