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곡 표지

장편소설

신곡

AI를 가장 잘 쓰는 서른여덟 살 직장인 서연우가 어느 금요일 밤 집으로 가는 길에서 멈춰 서고, 답 대신 질문만 건네는 안내자와 함께 자기 의식 속의 지옥과 연옥과 천국을 지나는 철학 판타지입니다.

분류
장편소설
부제
The New Comedy
출판
부크크
출간일
2026년 9월 14일
쪽수
220쪽
판형
148×210mm
ISBN
9791112292872

줄거리

서연우는 서른여덟 살의 회사원입니다. 열세 해째 같은 회사에 다니고, 사내에서 AI를 가장 능숙하게 다루는 사람으로 통합니다. 보고서 초안은 몇 초 만에 나오고, 점심 메뉴는 별점이 고르고, 주말 일정은 추천이 채웁니다. 일은 늘 무난하게 끝나지만, 회의에서 의견을 물으면 "아, 네네"라는 대답이 먼저 나옵니다. 그 대답이 어디서 왔는지는 연우 자신도 잘 모릅니다.

어느 금요일 밤, 야근을 마치고 집으로 걷던 연우는 지도 앱이 가리키는 길 위에서 걸음을 멈춥니다. 경로는 정확한데, 자기가 왜 그쪽으로 가고 있는지 설명할 수가 없었습니다. 익숙한 골목에 처음 보는 안개가 내려앉고, 다리 위에서 낡은 코트를 입은 남자가 말을 겁니다. 길을 잃은 것은 발이 아니라 생각이라고요. 그날 밤 연우는 현실 위에 겹쳐 있는 또 하나의 세계, 살아 있는 사람들의 의식이 만든 세계로 들어섭니다.

그 세계는 단테의 『신곡』처럼 세 부분으로 나뉩니다. 끝나지 않는 밤의 도시는 비교, 인정, 소비, 분노, 속도, 정보, AI, 성공, 공허라는 아홉 구역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곳 사람들은 벌을 받는 대신 생각을 멈춘 채 머뭅니다. 새벽의 돌산에서는 정답을 말하는 사람보다 좋은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 위로 오릅니다. 그 너머에는 정오의 도시가 있습니다.

안내자는 연우가 무엇을 물어도 답을 주지 않고 질문을 돌려줍니다. 연우는 그 질문들에 스스로 답해 가며 금요일 밤부터 월요일 아침까지 세 개의 세계를 걸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길 위에서 오래 잊고 지낸 이름 하나와 다시 마주칩니다.

등장인물

첫 장면에서

서른여덟 해를 사는 동안, 나는 한 번도 길을 잃어본 적이 없었다.
유능한 아침이었다. 유능한 것이 나는 아니었지만.

소설은 연우의 금요일 아침에서 시작합니다. 손목의 진동이 그를 깨우고, 눈을 뜬 지 4분 만에 커피 예약과 점심 약속 수락, 세탁물 수거 신청이 끝납니다. 현관 옆에는 이사 온 지 삼 년이 지나도록 풀지 않은 상자 세 개가 있고, 들뜬 테이프 틈으로 낡은 공책 한 권이 보입니다. 길을 잃어본 적이 없다는 첫 문장은 자신감처럼 들리지만, 몇 줄 뒤의 문장과 나란히 놓으면 조금 다르게 읽힙니다. 그동안 길을 찾아 준 것이 누구였는지를 묻게 되기 때문입니다.

작가의 말

단테는 고향에서 추방당한 뒤에 길을 잃었습니다. 우리는 어디에서도 쫓겨나지 않았는데 길을 잃습니다. 지도 앱은 집까지 가는 길을 초 단위로 알려 주고, AI는 웬만한 질문에 몇 초 안에 답합니다. 길을 잃기가 오히려 어려워진 시대입니다. 그런데 "요즘 어때?"라는 물음에 반 박자 늦게 "바빠"라고 답하는 순간들을 떠올려 보면, 우리는 꽤 자주, 아주 조용히 길을 잃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소설은 사람이 언제 길을 잃는지, 그리고 무엇으로 다시 길을 찾는지를 묻는 데서 출발했습니다.

AI를 다루는 소설은 대개 기계와 인간이 맞서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제가 일상에서 느끼는 감각은 대결과 거리가 멀었습니다. 편리하고, 그 편리함 아래로 설명하기 어려운 공허가 고입니다. 그래서 이 소설의 지옥에는 악역이 없습니다. 누가 생각을 빼앗아 가는 것보다 우리가 스스로 생각을 맡겨 버리는 쪽이 더 가까운 위험이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같은 이유로 주인공에게 휴대폰을 부수게 하지도 않았습니다. 제가 쓰고 싶었던 것은 기술을 버리는 이야기보다 생각의 주도권을 누가 쥐고 있느냐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신곡』의 구조를 빌린 것은 어둠에서 시작해 별에서 끝나는 그 여정의 문법이 지금도 유효하다고 믿어서입니다. 원작을 아는 분은 곳곳의 대응을 찾아보는 재미가 있을 것이고, 모르는 분도 불편 없이 읽으실 수 있도록 썼습니다. 작품 안에는 철학자의 이름이나 개념어가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안내자가 답을 주지 않듯이, 저도 이 책에서 답을 드리기보다 질문을 함께 걸어 보고 싶었습니다.

함께 생각해 볼 질문